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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축제전설


 

 

 

국사봉

도독골

아들바위

아차노리

황새바위,조개바위

원효정

부처고개

황금바위

국사봉 선각시

망아뜰

행단 부락 장군목

어수동

은혜를 아는 말

좌기동

안흥리

쇠목

요석궁지

   

 

dia_olive.gif 국사봉

 

 

주    소 :

동두천 탑동

교 통 편 :

시청에서 승용차로 20분


조선 세조는 과거를 후회하고 말년에 산수를 벗삼아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고 수렵에도 취미를 가졌다. 하루는 신하들과 함께 칠봉산에 사냥을 나왔다. 수렵할 때는 사방위 중에서 어느한 곳을 정하여 시사(示射)를 하고 그 다음에 사냥이 시작되는데, 이 관례대로 왕은 칠봉산에서 동북방으로 마주보이는 왕방산의 주봉(主峰)을 겨누어 활을 쏘았다하여 그 주봉을 국사봉(國射峰)이라 이름한다

 

dia_olive.gif 도독골

 

 

주    소 :

동두천 송내동 산 57 번지

위     치 :

소요산 광장, 3번국도 터미널에서 4km

교 통 편 :

시청에서 승용차로 20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자 경순왕의 친족들을 보호·감금하기 위하여 이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호위병을 배치하였으며, 이 지방에서 거둔 조세로 생활해 나가도록 위리안치(圍離安置) 한 곳이라 한다. 그후부터 이곳을 도독골로 칭하여 왔으며 이 산골짜기를 대대장골, 중대장골로 부른다.

 

dia_olive.gif 아들바위

 

 

주     소 :

동두천 탑동

위     치 :

시청에서 3번국도 전곡방향 4km 우분기 소요산 관광지

교 통 편 :

터미널에서 버스로 20분 (배차간격 1시간)


동두천시 탑동에 있는 바위다. 낙모루마을과 동점(銅店)마을 중간지점인 개천 가운데 우뚝 선 두개의 바위가 아들바위인데 옛날 자손이 없는 사람들이 자녀를 얻기 위해 개울 건너에 바위 하나를 지정하여 아들바위라 지칭하고 낙모루 마을 서향 3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낭바위에 앉아서 돌을 던져 아들바위를 맞히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dia_olive.gif 아차노리

 

 

주    소 :

동두천 송내동

교 통 편 :

시청에서 승용차로 15분


이 곳의 유래는 고려 말 무학대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주왕의 묘지를 잡기 위하여 천보산맥(天寶山脈)을 따라 지금 아차동(峨嵯洞)까지 왔다고 한다.
천보산의 형세로 보아 분명 대지가 있는 것으로 확신하였던 무학산맥이 여기서 끊기고 예측한 바와 크게 어긋나자 "앗차"하고 자책을 한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결국 무학대사는 그 부근에 주왕의 묘를 정하였다고 하며 주왕의 행자가 그 곳에 와서 묘막을 지었다하여 그 골짜기를 가리켜 행자막골이라 하였는데 점차 와전되어 함자막골로 불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이 무학이 자탄하고 "앗차"한 것을 그래로 붙어 왔으며 한자로 표기하기를 천보산 봉우리가 높고 험한 것을 뜻하여 '아차'로 하여 음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아차노리가 점차 변하여 아치노리가 된 것이다.


 

dia_olive.gif 황새바위,조개바위

 

 

주    소 :

동두천 하봉암동 산120 번지

교 통 편 :

터미널에서 버스로 15분 (배차간격 10분)


옛날 소요산 아래의 한 마을에 마음씨 곱고 효심이 갸륵한 나무꾼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무꾼은 노환이 드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여 장이 서는 날이면 내다 팔았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큰 욕심없이 성실하고 근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장가들 나이가 되자 아름다운 부인과 어머니를 모시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머리 속에 자주 그려보곤 하였다.
한편 마을 사람들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저 소요산 삼봉에 황금알을 낳는 닭이 있다는데 들어봤나?" "그래 ! 그 닭을 잡는 사람은 부자가 될거야." 나무꾼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야. 그런 헛소문 따위를 믿다니! 하면서 내심 그 닭을 잡아 단단히 한 몫을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머리에 꽉 차자 산에 오를 때마다 나무하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열심히 주위를 살피었다.
그 날도 닭을 찾느라 시간을 다 허비한 후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산을 내려오게 되었 다. 풀피리를 불면서 산을 내려오던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앞 바위 위에 커다란 닭이 풀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불던 풀피리를 멈추고 지게가 어깨 위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멍청히 닭은 쳐다보고 있었다.
풀피리 소리가 멈춰지자 닭은 홰를 치며 커다란 소리로 울었다. "아차, 저것이 바로 황금알을 낳는 닭이로구나 !" 나무꾼은 그제서야 닭을 잡기 위해 바위 옆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닭은 이미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는 정신없이 바위 주변을 살피었다. 아무 곳에서도 닭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힘없이 앉아 있던 그는 비로서 "이것은 산신령님께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려는 것일꺼야." 하며 헛된 생각을 버리기로 다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무꾼은 더욱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을 늘리고 노모를 편안하게 모시며 행복하게 살았다. 또한 황금알을 낳는 닭이 앉아 있었던 그때부터 황금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제공자 鄭用學 (남, 동두천시 걸산동 56번지)

 

 


dia_olive.gif 원효정
 

주     소 :

상봉암동 산 1번지


신라의 고승이었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나이 서른이 넘어 소요산에 머물며 수행을 쌓았다. 그 분의 덕행은 차츰 온 마을에 퍼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소요산에 모여들기 시작 하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요산은 돌산으로 마땅한 샘터를 찾기가 어려웠다. 모두들 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선정에 들어 지맥(地脈)을 관찰하다 바위 사이로 깨끗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음을 발견한 원효대사는 바위틈을 꿰뚫어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 이후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의 속병이나 갖가지 위장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만든 우물이라 하여 '원효정(元曉井)'이라 불리었던 것이 각지에 만병통치의 약물로 소문이 퍼져 특히 음력 3월 3일 삼짓날에는 물을 마시러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이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줄기가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상주승려(常住僧侶)가 수행에 어긋날 때에는 물이 조금씩밖에 나오질 않았다 한다.

또한 마음속에 음흉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들이나,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든지 육류를 즐기는 사람이 몸을 불결하게 하고 물을 마시려 하면 실그림자같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어 끝내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한다. 한번은 어느 아낙네가 이 곳의 물을 마시려 하다가 실그림자 같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은 보았다. 스님을 찾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고 웬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스님은 그녀와 함께 가서 물을 확인하고 떠 주었는데 아낙네는 여전이 물에 벌레가 있어 목에 걸릴 것 같아 도저히 못마시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아낙네가 자기는 평소에 절에 가는 것을 싫어했고, 시어머니가 억지로 가자고 해서 같이 따라와 약수가 좋다고 하기에 먹으려고 했던 것과 몸이 생리(生理) 중이고 오기 전날에도 불고기 지짐을 해 시어머니 몰래 다른 식구들과 먹었다는 것을 실토하였다 한다.

※ 참고문헌 양주군지 편집위원회편, '양주군지'. 양주군, 1978.

 


dia_olive.gif 부처고개
 

주    소 :

동두천시 광암동


지금의 동두천 시내에서 광암동으로 가는 도중에 고개가 하나 있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몹시 험하고 좁았으며 고개 옆에 커다란 바위가 길쪽으로 불쑥 나와 있었다. 어느 몹시 더운 날 부근 마을의 한 노인이 장을 보러 가다 고개를 넘게 되었다. 중간 에 숨이 차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던 노인은 우연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건이 바위 밑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노인이 아래로 내려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황금부처였다. 그는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부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부처는 마치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아 별 수 없이 그대로 장을 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볼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노인은 신기한 일도 다 있다며 사람들에게 그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 한 욕심장이가 슬그머니 빠져나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그걸 팔면 큰 돈이 생기겠지. 그런 걸 남한테 빼앗길 수야 없지. 암 그렇구말구!" 하며 그 욕심장이는 지게를 메고 고개로 올라갔다. 황금부처를 본 그의 눈은 탐욕으로 더욱 빛났다. 그러나 부처는 그의 힘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소를 머금은 채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는 지게 작대기로 이리저리 온갖 힘을 다했다. 그 순간 갑자기 그는 눈에 통증을 느꼈다. 그만 지게 작대기 끝에 눈을 찔리고 만 것이었다.

그후로 그는 결국 실명을 하였는데 이 사실이 온 마을에 퍼지게 되자 황금부처에 대해 욕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분명 이것은 보통 부처가 아니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게 틀림없어." 하면서 그들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에 한 스님이 시주를 오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에게 고개에 있는 황금부처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스님은 사람들과 함 께 고개로 올라갔다.

정성스럽게 염불을 외우고 절을 마친 스님은 부처 앞으로 다가가 마치 가벼운 물건을 집듯 한 손으로 사뿐히 부처를 들어 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 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무리 해도 꼼짝도 않더니." "글쎄 말이야." 하며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거렸다. 마을 사람들의 놀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스님은, "이 부처님은 소승이 영묘한 절을 찾아 모실 터이니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한 후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떠나는 길을 향해 절을 하며 덕이 높으신 분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로 이 고개를 '부처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제공자 심윤식 (남, 동두천시 광암동 494)

 


dia_olive.gif 황금바위
 

주    소 :

동두천시 걸산동 115


옛날 소요산 아래의 한 마을에 마음씨 곱고 효심이 갸륵한 나무꾼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무꾼은 노환이 드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여 장이 서는 날이면 내다 팔았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큰 욕심없이 성실하고 근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장가들 나이가 되자 아름다운 부인과 어머니를 모시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머리 속에 자주 그려보곤 하였다. 한편 마을 사람들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한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저 소요산 삼봉에 황금알을 낳는 닭이 있다는데 들어봤나?" "그래 ! 그 닭을 잡는 사람은 부자가 될거야." 나무꾼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야. 그런 헛소문 따위를 믿다니! 하면서 내심 그 닭을 잡아 단단히 한 몫을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머리에 꽉 차자 산에 오를 때마다 나무하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열심히 주위를 살피었다. 그 날도 닭을 찾느라 시간을 다 허비한 후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산을 내려오게 되었 다. 풀피리를 불면서 산을 내려오던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앞 바위 위에 커다란 닭이 풀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불던 풀피리를 멈추고 지게가 어깨 위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멍청히 닭은 쳐다보고 있었다. 풀피리 소리가 멈춰지자 닭은 홰를 치며 커다란 소리로 울었다. "아차, 저것이 바로 황금알을 낳는 닭이로구나 !" 나무꾼은 그제서야 닭을 잡기 위해 바위 옆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닭은 이미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는 정신없이 바위 주변을 살피었다. 아무 곳에서도 닭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힘없이 앉아 있던 그는 비로서 "이것은 산신령님께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려는 것일꺼야." 하며 헛된 생각을 버리기로 다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무꾼은 더욱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을 늘리고 노모를 편안하게 모시며 행복하게 살았다. 또한 황금알을 낳는 닭이 앉아 있었던 그때부터 황금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제공자 鄭用學 (남, 동두천시 걸산동 56번지)

 


dia_olive.gif 국사봉 선각시
 

주     소 :

동두천시 탑동 산 2번지


산세가 험하고 수풀이 우거져 있는 국사봉은 온갖 산짐승들이 살고 있는 경관이 빼어난 명산이었다. 오랜 옛날 이 산 아래에는 호젓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인근 고을까지 명망을 떨치는 뼈대있는 가문이 있었고, 이 집에는 여러 고을에서 며느리로 삼고 싶어하는 참한 규수가 있었다. 그 규수는 용모가 뛰어나고 행실이 단정할 뿐 아니라 효성 또한 지극하여 부모님의 사랑이 극진하였다. 그런데 이 규수의 얼굴에는 어쩐 일인지 늘 수심이 어렸고 가끔 꿈을 꾸고는 며칠씩 심하게 앓곤 하였다. 딸이 아픈 원인을 알 수 없는 규수의 어머니는 유명하다는 무당을 집으로 불렀다. "딸이 이유도 없이 저렇게 시름시름하니 그 원인이 무엇인가? 제발 저 아이가 기운을 차리게 해 주게. 내 보상은 후하게 할 터이니." 규수의 어머니는 간곡히 부탁을 하며 딸의 신수를 보게 하였다.

규수의 신수를 점쳐 본 무당은 그 규수의 앞날이 불운하다는 걸 알았다. 사실대로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나 큰 불행이 규수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규수 어머니의 강압적인 태도에 못이겨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저 규수는 처녀의 몸으로 죽어 국사봉을 지키는 혼령이 될 운명입니다." 규수의 어머니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 딸이 죽다니! 다시 한 번 봐 주게. 그럴 리가 없을거야." 하며 무당에게 매달렸다. 곧 훌륭한 가문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언약이 되어 있고 혼수준비 까지 마친 규수의 어머니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울음을 참지 못하였다. "다만 혼백이라도 편하게 굿을 치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는 무당의 권유에 슬픔을 삼키며 곧 굿을 치를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가족들의 기대를 져버린 채 그 규수는 무당의 말대로 혼인 전날 밤 죽고 말았다.

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부모는 성대히 장사 준비를 하여 모든 혼수감을 시신과 함께 국사봉에 묻어 주었다. 그 후 국사봉으로 도망치는 모든 짐승들은 처녀의 혼령이 보호하여 주었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함부로 근접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곳이 동물들의 낙원이 되었음은 물론 마을까지도 지켜주어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후로는 이 혼령을 선각시라 하여 국사봉에 오를 때에는 항시 경건한 마음으로 선각시에게 경의를 표하였다고 전해온다.

 


dia_olive.gif 망아뜰
 

주    소 :

동두천시 걸산동 50


동두천시 걸산동에 망아뜰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 지명(地名)은 조선조 말에 있었던 한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옛날 이 마을에는 화전(火田)을 일구며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다. 어느 해 여름 흙 먼지가 풀풀 일어나고 땅이 쩍쩍 갈라지는 가뭄이 들자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또한 관가에서는 이러한 흉년에는 역적이 많이 난다는 것을 빌미로 핏발을 곤두 세우며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심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 중에서도 사내아이일 경우 조금 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역적의 씨로 몰려 죽음을 당하는 수도 있었다. 때마침 농부의 아내는 임신 중이어서 그들 부부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마침내 산달이 되어 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흉년으로 인해 제대로 먹지를 못한 산모는 사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농부는 "내가 무능해서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구료. 엄마 없는 우리 아기 불쌍해서 어쩌란 말이요 !" 하며 흐느끼었다. 시신을 거두어 손수 아내를 묻고 돌아온 농부는 방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있어야 할 아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농부는 한참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시렁간 위에 않아서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아이를 찾아 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아들을 내려 놓다가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다니, 이 아인 보통 아이가 아니야. 아이고. 이일을 어쩌나 ! 나 같은 처지에 이런 아이가 있다면 역적으로 몰려 무사하지 못할 텐데." 하며 농부는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인두를 달구어 아들의 겨드랑이에 있는 새의 깃털을 짓이겨 버렸다.

그러자 그 아이는 한참을 소리 내어 울다가 마침내 숨이 끊어졌다. 아들이 죽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집 앞에서 망아지가 요란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망아지는 어느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 밤 낮을 계속 울기만 하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뒤늦게야 농부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뉘우쳤다. 역적으로 몰려 자신까지 해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아들마저 죽게 한 농부는 괴로움과 자책감으로 더 이상 그 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그는 곧 어디론가 자취를 감 추었다. 그 뒤 죽은 망아지에서 유래가 되어 농부의 집 앞에 있던 뜰이 망아뜰이라 불리어 졌다.

※ 제공자 鄭用學 (남, 동두천시 걸산동 56번)

 


dia_olive.gif 행단 부락 장군목
 

주    소 :

동두천시 내행동 행단 부락


동두천시 내행동 행단 부락에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깊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동두천 인근지역에서는 가장 역사가 깊은 나무로서 그 옆에는 오랜 세월을 같이 한 연못과 어유소 장군의 생가가 있어 한층 그 의미가 깊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수호신으로 여기어 나무 근처에는 상서롭지 못한 행동을 금하였으며 상여가 지나갈 때에도 나무를 피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어유소 장군은 어릴 때부터 이 나무 밑에 단을 쌓고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급기야 장원급제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마치 대화를 주고받듯 나무를 가까이 하였으며 장군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한 달 동안이나 가지를 축 늘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그 후로도 나라에 큰 변란이나 사건이 있을 때에는 나무가 우는 소리를 마을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가지가 부러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은 나라의 변고를 이 나무를 통해서 알 수 있었는데 비근한 예로 고종의 일과 6.25사변 발발시에도 큰 가지가 꺽이었다고 전해지며,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나무에 치성을 드려 마을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수의식을 매년 거행하고 있다.

 


dia_olive.gif 어수동
 

주    소 :

동두천시 생연동


태조 이성계가 아들 방원의 골육상쟁으로 인하여 함흥이궁으로 행하던 중 심화가 치밀고 노기가 동등하여 조갈이 심히 날 때 차고 맑은 샘물 한 그릇을 진상하였다하여 '진상한 샘 물', '임금님이 잡수신 우물'이라하여 그 물을 '어수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어수동이라 전하여 왔다. 이곳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수정에다 팔각으로 정자를 짓고 어수정이라하여 기념하고 있다.

 


dia_olive.gif 은혜를 아는 말(馬)
 

주    소 :

동두천시 동안동 창말부락


조선시대 중엽, 지금의 동두천시 동안동의 창말 부락에 김 육(金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을 몹시 좋아했고 그는 말을 타는 솜씨 또한 무척 뛰어났다. 또한 말 다루는 재능도 대단하여 다른 사람들이 다룰 수 없는 사납고 거친 말이라도 그의 손에 맡겨지면 양처럼 온순해지는 것이었다.

말들 중에서도 그는 건강하고 힘이 센 말 한 필을 특별히 아끼고 보살폈는데 어느날부터 인가 그 말이 평소와는 달리 제대로 먹지도 않고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그는 말 옆에서 같이 밤을 새우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였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수근 거리기 시작하였다. "사람에게도 저렇게는 못할거야. 정성이 대단한 사람이야." "정성은 무슨 정성, 저 사람은 미친 거라구!" "맞아! 말이 무슨 제 자식이라도 되는가! 너무 지나쳐." 평소에는 동물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자비로운 인품의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었지만 그가 말 곁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말을 돌보느라 지치고 초췌해진 주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노복들은 "저러다 주인님마져 쓰러지시겠어." "차라리 말이 빨리 죽기나 했으면 좋겠어." "이럴게 아니라 우리가 주인님 몰래 그 말을 죽여버리자구." 하는 말을 주고 받았다. 우연히 옆을 지나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은"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느냐! 어느 놈이든 말에 손을 대기만 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는 노복들의 마음을 아는지라 그들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말의 병세가 차츰 호전되었고 그제서야 그는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라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여절교위(勵節校尉)의 직책으로 난리를 평정하기 위하여 싸움터로 향했다. 물론 그가 아끼던 말도 함께 였다. 한편 집에서는 가족들과 노복들이 주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이제나저제나 하고 초조해하던 가족들이 하루는 대문 밖에서 나는 말 울음 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어나갔다. 그들은 너무나 놀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 곳에는 주인의 잘린 목 을 갖고 온 말이 서 있는 것이었다. 말도 너무 지친 나머지 한 번 더 힘차게 울고는 그 자 리에서 죽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슬픔에 잠긴 가족들을 그 말의 행동을 가상히 여겨 주인 의 목과 함께 묻어주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공자 金楊柳 (남, 동두천시 생연동 612번지)

 


dia_olive.gif 좌기동
 

예성군 어유소 장군(1433∼1489)으로 연유하여 성종이 이곳에 거동하여 잠깐 좌정하였던 사실이 있어 그 후부터 좌기동으로 불리어졌고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와전되어 '좌기골'로 부른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성종이 좌정하여 어장군의 궁술을 시험코자 공중에 날고 있는 솔개미를 쏘게 한 후 솔개미 떨어지는 곳까지 땅을 하사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윽고 어장군의 백발백중하는 화살은 창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더니 솔개미를 맞추고 화살을 맞은 솔개미는 허공을 돌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의 광암, 걸산, 송내, 지행, 보산, 동두천 일대가 전부 어장군의 사패지가 되었다고 한다. 어유소 장군의 묘소도 이곳 미2사단 영내에 있다.

* 참고 문헌 양주군지 편집위원회편, 양주군지, 양주군,1978.

 


dia_olive.gif 안흥리
 


송우암의 문하생 이 담이 이 곳 흥경암에서 공부 하였으며 그의 후손 이 유가 여기 주위에 넓게 돌담을 쌓고 살았다하여 담안이라고 불리어 왔다. 또 고려말 어느 옹주의 묘를 이 곳에 안장하고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안흥사를 지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돌담은 무너져 군데군데 흔적만 남아 있고 옹주의 묘는 평지가 되어 흔적도 없어졌다. 절도 없어졌고 다만 안흥사가 있었다하여 동명만 안흥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 참고문헌 양주군지 편집위원회편 ,양주군지, 양주군, 1978.

 


dia_olive.gif 쇠 목
 

주    소 :

동두천시 광암동 쇠목부락


동두천시 광암동에 쇠목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입구에는 그리 높지 않으나 그 밑에 소(沼)가 깊은 폭포가 있으며 이 폭포에 얽힌 이야기가 옛부터 전해온다. 오래 전 이 폭포밑의 웅덩이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은 평소에는 이무기가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얌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가 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폭포 밑으로 끌고 왔다. 농 부는 소를 울덩이 옆 나무에 매어 물을 먹도록 한 뒤 자신도 누워서 눈을 붙였다. 단잠을 자고 일어난 그는 나무에 매어 놓은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매우 당황이 되었다. 소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농부에게 있어 생계의 근원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참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소의 고삐 줄만이 웅덩이 속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고삐 줄을 잡아당겨 보니 소는 흔적조차 없고 한 가닥의 줄만이 올라왔다.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힘없이 마을로 돌아온 농부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지만 그들을 별 해괴한 소리를 다 한다며 괜히 소를 잃어버린 핑계를 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 또 다시 비슷한 일이 발생하자 이 때서야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일어난걸 보면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모두 다 웅덩이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혹시 그 웅덩이 속에 뭔가 있지 않을까?" "그럼 이렇게 해 보자고. 함정을 만들어 걸려 들게 하는거야." 그들은 이렇게 계획대로 소를 끌고 가 웅덩이 근처에 묶어 놓고 모두 숨어서 기다렸다. 얼마 후 웅덩이 속에서 커다란 이무기가 슬그머니 올라오자 마을 사람들은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이무기는 소를 끌고 웅덩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무기가 사라진 후 한동안 넋이 나갔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그 속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니!" "이대로 있다간 계속 피해만 보겠어. 무슨 수를 써야지" "생각해 보게. 이 일은 소하고 연관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이 근처에 소를 매어 두지 않으면 이무기도 웅덩이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그들은 오랜 의논 끝에 이무기를 이용하기로 하고 그 꾀를 짜내었다.가뭄이 들 때마다 이무기가 있는 웅덩이의 물을 퍼내어 징을 두들겨 이무기의 화를 돋군 후 심술로 비를 내리게 함으로써 아무 걱정이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무기가 소를 끌고 사라졌던 웅덩이는 그 이후 '송아지 웅덩이'라 불리었으며 또한 마을의 이름도 '쇠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공자 沈 植 (남, 동두천시 광암동 494)

 


dia_olive.gif 요석궁지
 

주    소 :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번지


원효대사는 신라의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라고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태종무열왕은 누가 귀부인을 원효대사와 맺어주면 국가에 큰 일을 할 사람을 낳겠다는 의미라고 간파하였다. 마침 문무왕 의 딸인 요석공주가 백제와의 싸움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후라 원효대사를 그녀와 맺어줄 것을 결심하고 그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요석공주 또한 이미 원효대사의 명성을 들어왔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원효대사가 경주에 있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난다는 것을 미리 조사한 궁리들이 이 사실을 요석공주에게 알리자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궁내로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대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길을 막은후 요석궁 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원효대사가 껄껄 웃으며 못 가겠다고 하자 나졸 중의 대표 한 사람 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으로 가고 반대로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말에 대사는 족히 승낙을 하고 무술을 겨루었는데 출가하기 전 낭도로서 무예가 특출했던 원효대사와 나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요석궁으로 꼭 모시고 오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나졸들이 이번에는 일제 히 원효대사에게 달려 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대사 는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 밑에는 허위적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 한 명과 함께 원효대사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젖은 옷을 말려드린다는 구실을 삼아 요석궁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이 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원효대사는 파계하였다고 속복으로 바뀌어 입고 소성거사라고 자칭하면서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보고 도구를 만들어 무애라 이름 짓고, 촌락으로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기 시작하여 후일 삼국통일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대략 30∼40세 정도 되었을 때 소요산에 머무르며 지금의 원효대에서 공부를 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요석공주도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에 들어와 조그마한 별궁을 짓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원효대사가 공부하는 원효대를 향하여 삼배를 드렸다고 전 해오고 있으며, 그 때의 별궁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 요석궁지라 불리고 있다.

*참고문헌 양주군지 편집위원회편, 양주군지, 양주군,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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